서형욱-아스널 아슨 벵거의 레볼루션 (scrap)

칼럼 번역,Scrap



출처: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worldfootball&ctg=issue&mod=read&issue_id=437&issue_item_id=9012&office_id=260&article_id=0000000151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아스널은 ‘빅4’ 탈락의 1순위 후보자로 꼽혔다. 티에리 앙리와 솔 캠벨의 공백을 메웠던 아데바요르와 콜로 투레가 나란히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했고, 수비수 베르마엘렌을 제외하면 이렇다할만한 영입 선수가 없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예측이었다. 하지만, 아스널은 개막전에서 에버턴을 분쇄한 뒤 맨유와의 경기에서도 우세한 경기 끝에 석패하는 등 오히려 예년보다 더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아스널의 놀라운 질주의 중심에는 아슨 벵거가 있다. 지난 13년 동안 굳건하게 팀을 지킨 이 남자는 5년전 무패 우승의 주역들이 모두 팀을 떠난 지금, 완전히 물갈이된 스쿼드로 또 한 번의 ‘뷰티풀 게임’을 구현하려 한다.

‘지루하디 지루한’ 아스널 (Boring Boring Arsenal)

2003/2004 시즌. 아스널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축구’의 품위를 잃지 않은 채 무패 우승을 일궈낸 그들에게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냈다.

사실, 아스널은 오랫동안 지루한 축구의 대명사로 통했다. 대표적인 아스널 팬으로 꼽히는 베스트셀러 작가 닉 혼비가 늘 자조적으로 되뇌이던 과거 아스널 축구의 지루함(Boring, boring, Arsenal)은 지역 라이벌 토트넘이 상대적으로 공격적이며 화려한 팀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만들 정도로 유명했다. 사실, 아스널 축구가 지루하다는 주장은 그들의 첫 번째 전성기였던 허버트 채프만 시대(1930년대)에 조금은 다른 의미로 등장한 것이었다. 당시 아스널은 상대에게 점유율을 많이 내주면서도 높은 집중력과 날카로운 공격력으로 대승을 거두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스널에 패한 감독들은 “아스널이 지루한 축구를 하는 바람에 이기지 못한 것”이라고 변명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아스널은 다른 팀들의 질시 속에 ‘지루한 팀’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라고.

하지만, 18년 동안 리그 우승과 거리가 멀었던 7~80년대 암흑기를 거쳐 수비를 중시하는 조지 그레이엄 시대(1986~1995)를 겪는 동안 아스널에 덧씌워진 ‘지루한 팀’의 이미지는 아스널 팬들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아스널이 당시 일본 J리그 감독을 맡고 있던 프랑스인을 감독직에 앉힌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벵거의 등장 ‘아슨.. 누구?’

프랑스 출신의 감독 아슨 벵거는 당시 낭시와 AS모나코에서 11년간 지휘봉을 잡은 뒤 여러 가지 이유로 일본에 건너가 있었다. 유럽 축구계에서 크게 주목받는 인사가 아니었던 탓에 영국 언론들은 그의 아스널 부임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런던의 석간 신문 <이브닝 스탠더드>가 큼지막하게 박아 낸 “아슨 누구? (Arsene Who?)”라는 헤드라인은 아스널의 벵거 선임을 비꼰 대표적 사례이자 당시 영국 축구계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유물이다.

1996년 9월, 아슨 벵거가 부임할 당시 아스널은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9년 동안 팀을 이끌던 그레이엄이 선수 영입 과정에서 에이전트에게 뒷돈을 받은 혐의로 경질된데다 후임 리오크 감독 체제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2년 프리미어리그가 시작된 뒤 단 한 번도 Top 3 안에 들지 못했던 아스널은 22개팀이 속해 매 시즌 42경기를 치르던 당시 포맷에서 시즌 50골 이상 넣기도 버거워하는 ‘지루한’ 팀으로 전락한 터였다. 스리백 대인마크의 터프한 수비가 가장 믿을만한 구석이었던 아스널은 매 시즌 30골씩 터뜨려주는 이안 라이트의 존재만이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벵거를 바라보는 영국 축구계의 시선은 싸늘함 그 자체였다. 외국인, 그것도 하필일본 프로팀 감독을 맡고 있던 프랑스인 감독이라니. 이런 남자가 런던을 대표하는 명문 구단의 위기를 책임질 해결사로 투입되자 모두들 걱정과 시샘이 가득한 눈으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했다. 물론, 아슨 벵거가 무려 10여년을 더 그 곳에 머물며 영국 축구를 개혁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무명 선수에서 유명 감독으로

벵거의 선수 생활은 평범했다. 스트라스부르의 리그 우승 멤버였다는 것 정도가 눈에 띄지만, 그나마 한 시즌에 몇 경기 뛰지도 못했으니 내세울 경력은 아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성공적인 선수 시절을 보내지 못한 것이 이대로 잊혀질 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불러왔다”고 밝힌 벵거는 자신이 선수로 성공할 재목이 아니라는 데에서 찾아온 좌절감을 오히려 자극제로 삼았다. 예나 지금이나 동료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던 그는 오프 시즌을 이용해 영국 캠브릿지로 3주간 영어 연수를 떠나거나, 평소 관심이 많던 공산주의 체제를 체험하겠다며 헝가리로 여행을 다녀오는 등 다른 선수들과는 다른 행보를 걸으며 미래를 준비했다.

선수 시절부터 지도자 생활을 준비한 벵거의 방식은 시작부터 독특했다. 특히, 경기장 안팎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려드는 벵거의 스타일은 일반적인 기존 감독들의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은퇴 이후, 스트라스부르 유스팀 코치와 칸느의 수석 코치를 거쳐 처음으로 감독 지휘봉을 잡은 낭시(1984년)에서 그는 선수들의 아내들을 불러 앉힌 채 ‘선수 전용 식단’ 특강을 실시할 정도로 꼼꼼하게 팀을 관리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낭시는 벵거 재임 2년만에 리그 19위를 기록하며 2부 리그로 강등된다. 그러나, 그의 지도력을 높이 산 AS모나코가 손을 내밀었고 벵거는 모나코 부임 1년만에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첫 시즌의 성공은 그의 팀내 입지를 굳혀주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 벵거는 모나코를 7년 더 이끌게 된다. 이 기간, 그는 유리 조르카예프, 티에리 앙리, 조지 웨아 등을 발굴해 그들의 잠재력을 성공적으로 끌어내기도 했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모나코를 이끌던 벵거는 팀내 권력 구조의 개편과 성적 부진이 맞물려 팀을 떠난다. 마르세유의 승부조작 파문으로 어수선하던 프랑스 리그에 환멸을 느낀 벵거는 일본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의 감독직 제안을 받아들여 아시아로 떠난다. 이 때 벵거는 이후 아스널에서의 성공을 훌륭하게 돕게 되는 보로 프리모락을 수석코치로 동참시킨다. 그 무렵 발렝시엔느 감독직을 내려놓은 프리모락은 ‘승부조작설’의 주역인 마르세유 구단주의 악행에 반기를 들고 분투했지만, 리그 내에서 ‘내부고발자’로 몰리는 분위기 속에 어려움에 처해 있던 터였다. (프리모락과의 의기투합은 벵거의 지도자 철학의 일면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인간의 선한 의지와 성선설을 믿는, 그리고 축구를 빼면 인생에 남는 게 없는다던 벵거 감독의 고백은 자신과 똑같은 철학을 공유한 동지와의 결합, 그리고 그와 10여년을 동고동락하는 진득함으로 이어져 아슨 벵거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하나의 커다란 단초가 된다.)

지친 마음을 달래려 떠난 일본행은 벵거의 지도 철학을 숙성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미 과학적 섭취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벵거는 비만이 적은 일본인들의 체형과 그들의 식단을 보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내 평생 이렇게 좋은 식단은 본 적이 없었다. 삶은 야채와 밥, 생선… 지방과 당분이 최소화된 식단을 보고 감명받았다.” 하지만, 물론 식이요법이 전부는 아니었다. 벵거는 일본에서 보낸 18개월 동안 낯선 문화 속에서 새로운 기운을 얻었고 국외자의 시선으로 유럽 축구를 바라보며 마음의 여유를 되찾게 된다.

모나코에서 전도유망한 감독으로 주목받던 벵거는 일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한층 성숙된 지도 철학으로 재무장했다. 영국 언론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아스널에 입성한 벵거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침체에 빠져있던 팀을 개혁하기 시작한다.

아슨 벵거 레볼루션 1 – 훈련 체계를 뒤흔들다

하지만, 시작은 쉽지 않았다. 당시 그는 프리미어리그의 유일한 외국인 감독이었다. 요세프 벵글로스(애스턴 빌라/1992년)가 실패하고 떠난 이후 처음 당도한 외국인 감독에게 선수들 역시 큰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이 낯선 프랑스인 감독은 이전 감독들이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팀을 이끌려 했다. 이를테면, 벵거는 선수들에게 오래 달리기를 금지했다. 짧은 거리를 뛰더라도 반드시 공을 가지고 움직이게 했으며 그나마 하루 훈련량은 1시간을 넘지 않았다. 기존 방식과 너무 다른 벵거 스타일 훈련에 몸이 근질근질했던 선수들이 오히려 감독에게 “더 뛰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지금은 BBC-TV <매치 오브 더 데이>에서 해설자로 활약 중인 수비수 리 딕슨은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주장이었던 토니 아담스와 함께 감독에게 찾아갈 정도였다. 시즌 개막이 코 앞인데 훈련량이 너무 적어서 걱정이니 더 많이 뛰도록 해달라고 졸랐으니까. 하지만, 감독님은 자기를 믿어달라며 훈련량을 늘리지 않더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경기 당일 늦잠자는데 익숙하던 선수들을 아침 8시에 깨워 호텔 로비에서 줄지어 스트레칭을 시키자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수들은 시즌이 시작될 때까지 툴툴거렸지만, 벵거 부임 이후 첫 번째 풀타임 시즌이던 1997/1998 시즌이 끝났을 때,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당시 아스널은 3월까지 1위 맨유에 승점 12점이 뒤져 있었지만 막판 엄청난 속도로 승점을 쌓아올려 맨유를 승점 1점 차로 제치고 뒤집기 우승에 성공했다. 그리고, 리그 종료 후에 열린 FA컵 결승전에서도 아스널은 뉴캐슬을 2-0으로 누르며 시즌 2관왕을 달성한다.

이 시즌의 성과로 벵거 감독은 자신을 향한 의뭉스런 시선을 온전히 벗겨내는데 성공한다. 오히려 영국 축구계는 벵거가 어떻게 아스널을 수렁에서 구해냈는지 그 비밀을 캐내기 위해 혈안이 되기 시작했다. 당시 아스널의 주전 골키퍼였던 데이비드 시먼은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대표팀에 소집될 때마다 다른 클럽 선수들이 우리 훈련 방식을 꼬치꼬치 캐묻고는 클럽에 돌아가서 그대로 따라 하더라”며 당시 아스널식 훈련법 열풍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만해도 시즌 말미가 되면 경기 막판 체력적 부담을 느껴 실수가 잦았던 게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벵거는 그 무렵 잉글랜드 클럽들이 체계적인 계획 수립없이 과도한 훈련량과 비효율적인 훈련방식을 선수들에게 강요해 체력을 낭비한다고 봤고, 한동안 선수들에게 팀 고유의 훈련법을 외부에 노출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물론, 아스널식 훈련법은 벵거의 정책과 무관하게 머지 않아 프리미어리그 대부분의 클럽들이 도입하게 된다.

아슨 벵거 레볼루션 2 – 식이요법

벵거 감독은 아무렇지 않게 맥주를 마시고 피시 앤 칩스를 즐기던 영국 축구 선수들의 생활 패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영국은 대륙 축구 클럽들에 비해 선수단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선수들이 먹는 것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벵거가 부임하기 석달 전에 영국에서 치러진 유로96(유럽축구선수권대회) 기간 동안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단의 식단을 본 프랑스의 한 매체는 토스트, 스파게티, 토마토 수프로 구성된 식단을 보고 “승리(win)를 위한 식단이 아니라 방귀(wind)를 뀌라는 식단”이라고 혹평을 했을 정도였다.

특히, 아스널은 그 중에서도 최악의 수준이었다. ‘훈련 뒤 맥주 한 잔’이 일상화되어 있었고 훈련장에서는 햄버거, 감자튀김 같은 음식이 선수들에게 매일 제공됐다. 벵거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식단에 손을 댔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여기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이전의 ‘영국식’ 음식을 모두 식단에서 빼고 생선, 파스타, 닭고기, 야채 위주로 메뉴를 재구성했다. 단백질 합성을 방해하는 알코올 섭취를 금했고, 홍차에 설탕도 넣지 못하게 했다. 경기가 끝난 뒤 버스 안에서 하나씩 깨물어먹던 초코바 역시 금지시켰다. 이처럼 강력한 식사조절 방침은 선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에서 온 감독을 아직 신뢰하지 못하던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린 스니커즈가 먹고 싶다구요~”라는 노래를 합창하기까지 했을 정도. 하지만, 지난 10년간 모든 게 변했고 이제는 대부분의 클럽들이 벵거식 식단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먹을 음식을 결정하고 있다.

아슨 벵거 레볼루션 3 – ‘워커홀릭’ 혹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아슨 벵거 감독의 일상은 오로지 축구가 전부다. 경마나 골프 같은 취미는 벵거와 거리가 멀다. 경기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 전 세계 클럽들의 경기를 리뷰하거나 아스널 경기의 약점을 짚어내는 것이 취미라고 할 만큼 축구에 빠져 산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는 “이 일을 30년 동안 하면 미칠 수 밖에 없다. 축구는 30년간 내 삶을 지배했고 그러면 당연히 내 정신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테니까”라고 자신의 ‘워커홀릭’ 증세를 인정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 언젠가 한 기자가 “축구에 완전히 미쳤군요”라고 묻자 “세상의 모든 위대한 업적은 정신 나간 사람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어쩌면, 벵거의 이러한 축구 중독증이야말로 아스널의 현재를 있게 한 가장 큰 자산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경기를 보고, 또 어떻게 치러야 하는 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벵거는 축구의 영향력과 책임감을 늘 강조한다. 선수들에게도 승리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철학을 어릴 때부터 이식하려 애쓴다.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며 또 그렇기 때문에 축구 선수들은 그에 합당한 수준의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축구는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스포츠다. 그에 걸맞는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문화적이고 인종적인 문제의 최전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벵거의 말은 아스널 축구가 ‘승리’라는 클럽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뷰티풀 게임’을 추구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벵거는 자신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긴 팀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요 의무라며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직 제안을 거절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한다.

아슨 벵거 레볼루션 4 - 메이드 인 아스널

21세기에 들어 벵거는 또 하나의 변혁을 꿈꾼다. 아스널은 거대한 경기장을 신축해 이전할 계획을 세운 뒤 자금의 압박을 받게 된다. 마침 벵거는 거액을 들여 영입한 선수들의 연이은 실패로 선수 영입 경쟁을 통한 이적료 상승이 극대화되는 현실에 회의를 갖게 된 터였다. 사무엘 에토,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같은 선수들의 영입을 망설였다가 이들이 대형 스타가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경험도 가능성있는 어린 선수들을 확보하는 데에 욕심을 내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벵거 감독은 유소년 정책을 연구하고 전문 스태프를 고용하는 등 이른바 ‘메이드 인아스널’로 선수단을 재구성하는 계획에 천착하게 된다. 점차 다국적화 되어가는 선수단 구성을바라보며, 다양한 출신의 어린 유망주들을 일찌감치 영입해 어릴 때부터 함께 클럽의 문화와 플레이 스타일을 익힌다면 비교적 적은 비용을 들이고도 실패 확률을 낮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부터 벵거는 25세가 넘은 선수들의 영입을 최대한 억제하고 10대 선수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세계 곳곳에 스카우트들을 파견해 어린 유망주들을 선별, 영입하게 된다. 세스크 파브레가스, 마티유 플라미니, 필립 센데로스, 가엘 클리시 등 아직 1군 무대에 데뷔하지 않았거나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않은 선수들을 영입해 장기적인 플랜으로 팀을 재구성해 나갔다. 

베테랑 선수들의 영입을 배제한 이러한 전략은 데니스 베르캄프, 솔 캠벨, 파트릭 비에라, 티에리 앙리, 알렉산더 흘렙, 프레디 륭베리 등 무패 우승 전후로 이른바 ‘벵거볼’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선수들이 팀을 이탈하는 것과 맞물려 아스널을 긴 부진의 늪으로 이끌기에 이른다. 실제로 아스널은 2005년 FA컵 우승 이후 4년 동안 단 하나의 우승컵도 없이 시즌을 흘려 보냈다. 벵거 감독 부임 이후 가장 긴 무관의 시간이다.

진정한 개혁 - 2세대 아스널의 완성

지난 시즌이 끝난 뒤, 벵거 감독은 아스널 팬들의 비난이 도를 넘었다며 불쾌감을 드러낸 바 있다. 넉넉치 않은 팀의 재정을 감안해 어린 선수들의 성장을 배려한 운영하다보니 팬들의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한 데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오프 시즌 동안 진행된 선수 이적 시장에서도 벵거 감독은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일찌감치 수비수 베르마엘렌을 영입하긴 했지만, 문제로 지적되던 최전방 공격수와 중앙 미드필드 쪽에는 결국 아무런 추가 영입도 하지 못했다. 특히, 프랑스 리그 보르도의 샤막 영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펼친 ‘에누리 배틀’마저 실패로 끝나자 아스널 팬들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닌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벵거는 원래 그런 남자다. 기다릴 줄 아는 자세와 보수적인 마인드를 겸비한 벵거는 자신이 정한 한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전략을 수립하고 수행한다. 보르도와 계약 만료를 1년 남겨둔 샤막에게 과도한 이적료를 지불하지 않겠다는 고집은 어찌보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지만, 여느 팀 감독들보다 큰 권한을 부여받은 자신의 처지를 간과하지 않는 책임감과 자신이 길러낸 스쿼드에 대한 확신으로 새로운 시즌에 몸을 내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공들였던 ‘메이드 인 아스널’은 이제 최대의 시험 무대를 앞에 두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벵거볼’의 뷰티풀 게임을 온몸으로 체득한 스무 살 안팎의 선수들은 누구와 맞서도 물러서지 않는 공격적인 스타일로 또 한 번 리그 정상 도전에 나설 참이다. 아직 모자란 것이 많고 경험도 부족한 선수들이지만,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 같은 표정으로 자신들의 뒤를 지키고 서 있을 벵거 감독이 있다면 누구도 이 팀을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맨유를 감히(?) ‘안티 풋볼’이라 외치던 벵거 감독은 그렇게 또 한 번의 변혁(revolution)을 우리 앞에 펼쳐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