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넥타이'에 해당되는 글 1건

하이버리 전 상서 by 서형욱 (scrap)

칼럼 번역,Scrap

2011년 7월 15일 올라온 글입니다.

( 출처: 하이버리  서형욱 해설님)

0.

세상 옳고 그름에 모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입장마다 받아들이는게 다른거니까.

나에게 좋은 사람이 누군가에겐 나쁜 사람일수 있고
나에게 나쁜 사람이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일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모든 게 다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진리(혹은 상식)는 있을겁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것 같은.

뭐, 거창하게 얘기하면 '정의'일수도 있겠죠.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되는 것.

1.

아슨 벵거라는 남자,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때로는, 개인적 친소 관계를 떠나 그 사람의 언행만으로 누군가를 파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공적인 일을 진행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러하죠.

축구팀을 운영하고 이끄는 일을,
저는 공적인 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 행동의 결과가 자신만의 몫으로 귀결되지 않기 때문이죠.

축구 감독 같은 경우 더 그러하겠죠.
특히, 아슨 벵거처럼 단순한 coach 이상의 역할을 맡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2.

저는 아슨 벵거를 꽤나 좋아합니다.
친분도 없고 남들에 비해 그를 딱히 더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보여준 언행과 삶의 궤적에서 느껴지는
축구 철학이나 고집스런 태도가 참 맘에 듭니다.

스스로에 철저하기에 스스로의 신념에 당당하며
타인의 눈을 의식해 현실과 쉽게 타협하지 않으며
그래서 늘 신경쇠약직전의 남자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

그를 볼 때면 늘 넥타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멋대가리 없는 디자인에 특히 그 매듭.
살면서 수백 수천 번을 맸을텐데 어쩌면 그리도 매듭을 이쁘게 못 매는지.
준수한 외모와 부러운 기럭지를 가졌으니 조금만 신경쓰면
누구 못지 않은 패셔니스타 소리를 들을 수 있을텐데 말이죠.

3.

하지만 그게 벵거죠.
벵거의 기준은 늘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눈.
그가 축구에 바치는 시간이나 노력, 그리고 그에 걸맞는 혜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벵거는 자신의 철학과 자신의 구상을 구현하는 데에 전력을 쏟습니다.

때로는 비판을 받기도 하죠.
잘못된 영입이나, 잘못된 전술.
하지만 다른 감독들에 비하면 그마저도 참 드뭅니다.
그만큼 준비하고 애를 쓴 덕분이겠죠. 실수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제가 벵거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그의 철학이 저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는 바로 그 근거는
그가 상식적인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상식'은 비합리적인, 비정상적인 재원을 배제합니다.
'축구선수'들이 지나치게 많은 돈에 몸을 움직이는 것에도 예민합니다.

축구판에 아무리 많은 거품이 끼고
다른 클럽들이 거액을 물쓰듯이 써도
자신의 신념을 쉽게 바꾸지 않는 것.
세상의 변화에 타협하지 않는 견고한 자기 확신.

4.

아스널이 일정액 이상의 과도한 금액을 이적료에 지불하거나
선수들에게 (라이벌 클럽에 비하면) 지나치게 높은 급료를 지급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 것은 돈이 없어서만은 아니죠.

몇 년간 우승이 없고, 똑같은 지적과 요구가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에 큰 변화가 없는 것은
그 스스로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겁니다.

그리고 지난 수 년간, (적어도 저는) 그의 정책이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스쿼드로 이런 성적을 내는 것.
시즌의 어느 한 순간만큼은 우승에 대한 가능성을 꾸준히 유지해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스널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맨유나 맨시티나 첼시 선수들에 비해
결 코 유 명 하 지 않 습 니 다.
게다가 그들이 받는 급료의 차이는 어마어마하죠.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의지가 없어 보입니다.
국적 불문하고 자기 클럽에서 키워낸 선수들로
팀을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는 놀라울만큼 견고하니까요.

5.

문제는 트로피의 유무가 아닐겁니다.
그의 철학과 정책을 지지할 것인가, 혹은 포기할 것인가.
아스널의 힘과 전통은, 벵거를 지지하고 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리고 벵거는, 아스널이 그렇게 지켜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죠.

물론 팬은 다릅니다.
이기고 싶어하고,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싶어하죠.
그건 모든 팀들, 모든 팬들, 특히 명문팀의 팬들이라면 다 똑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스널이, 벵거가 그렇지 않기에 더 가치있는 팀이라 생각합니다.
손에 돈을 쥐고도 낭비하지 않는 사람, 그게 단지 장부의 플러스 마이너스가 아닌
자신의 철학과 상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런 감독이 이끄는 팀의 팬이라는게 꽤 자랑스러울수도 있겠다는 생각.

6.

우승은 언제든 할 수 있는거죠. 1년이 걸리든 100년이 걸리든.
하지만 과다경쟁의 물살에 휩쓸려 경쟁하는 것(도 의미있을지 모르지만)보다는
이런 식으로 끝끝내 성과를 내는 모습을 기다려보는것도 의미있지 않을런지.

벵거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감독이고
그래서 아스널은 매혹적인 클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처럼 글도 남겨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싶어 두서없이.

늘 그렇듯,
세상에 정답이란 없는걸테지만 말이죠.